밤하늘을 가득 수놓은 별. 어둠과 밝음이 공존하는 세상 속 소년은 별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린다. 별에 닿을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는 자전거 페달을 있는 힘껏 밟으며 나아간다. 마치 별이 되고 싶은 것처럼, 혹은 별을 닮은 누군가를 발견한 것처럼, 그도 아니면 스스로 별이 돼 사라지고 싶었던 것처럼. 소년의 울부짖음이 날개가 돼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처연하다.
연극 ‘킬롤로지’는 ‘연극열전7’ 첫 번째 작품으로 상대를 잔인하게 죽일수록 높은 점수를 받는 온라인 게임 ‘Killology’ 개발자, 게임과 동일한 방법으로 살해된 소년, 소년의 아버지를 통해 이 시대에 만연한 폭력의 원인과 결과, 책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번 공연에서 게임과 동일한 방법으로 살해된 소년 데이비 역을 맡은 배우 장율과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 독백(獨白), 배우가 상대역 없이 혼자 말하는 행위. 또는 그런 대사
“일단 연극열전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그간 제안해준 작품들 모두 이야기나 주제 등이 흥미로웠고 좋았어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에요.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는 정말 어려웠지만 읽고 또 읽다 보니 재미있더라고요. 독백으로 이뤄진 대본을 경험해 본 적 없었기에 한 번 도전해 보면 어떨까 싶었죠. 그게 참여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어졌어요.”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이처럼 ‘킬롤로지’는 무대에 오르는 배우에게도, 객석에 앉아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에게도 어렵지만 매혹적인 작품으로 다가왔다. 대화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기존 작품과 달리, 이 연극은 개개인의 독백으로 촘촘하게 채워져 있어 독특한 재미를 선사한다. 서로 다른 독백이 오고 가며 어떠한 지점에서 만나기도 하고, 또 흩어지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말을 하지만, 때로는 말을 하지 않는 순간이 더 많을 때가 있어요. 반면에 이 작품은 무대에서 배우들이 화자가 돼 관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죠. 극중 인물들이 말을 한다는 게 중요해요. 가슴 속 이야기를 꺼내놓기도 하고, 과거를 털어놓기도 하죠. 또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이야기해요. 그 과정에서 어떠한 감정이 유발되는데 그게 바로 ‘킬롤로지’의 매력이에요.”
이에 “배우가 연기로 이야기를 잘 전달해야 한다”고 장율은 끊임없이 강조했다. 걱정 어린 표정이 무색하게도 ‘킬롤로지’는 구멍 하나 없는 배우들의 열연으로 120분을 가득 채운다. 다만 독백이 주는 ‘낯섦’과 이질감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 뿐. 관객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해 ‘내가 지금 무엇을 본 건가’ 자문하게 된다. 오롯이 이들의 감정을 느끼고, 함께 호흡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공연을 곱씹고 생각을 거듭할수록 부족한 이해력이 야속할 따름. 반면 장율은 ‘어려운 작품’이라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제 생각은 달라요. 독백으로 이뤄져 있지만 이야기는 차곡차곡 쌓여가죠. 그대로 내버려 두면 돼요. 굳이 데이비의 독백을 듣고 그 인물을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되죠. 들리는 대로 듣고, 따라가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어떠한 감정이 생기게 되는데 그 감정에 공감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이렇게 쌓인 이야기들이 결국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그것 그대로 두고 보면 좋을 것 같아요.(웃음)”
흐름을 놓치고 싶은 않은 욕심, 온전히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빚어낸 참사. 장율 역시 이러한 심정을 깊이 이해했다. 그는 “대본을 읽었을 때 어려웠던 지점이 바로 그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장율은 “자꾸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넘어가 어려웠다. 몇 번 읽다 보니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대본을 보게 되더라. 그제야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고 자신의 경험을 조심스럽게 공유했다.
흥미로운 요소였던 독백은 연습과 동시에 고통이 돼 돌아왔다. 장율은 방대한 양의 대사를 소화하기 위해 고민을 거듭해야 했다. 대사를 외우려 읽고 또 읽고, 때로는 쓰고 때로는 녹음을 해 들으며 암기에 집중했다. 그는 많은 방법 중 ‘상상’하는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더디지만 확실한 방법을 찾았지만, 대신 암기 시간은 배로 늘어났다.
“그동안 대사 많은 공연을 주로 해왔어요. 하지만 독백으로 이뤄진 작품은 해본 적 없죠. 그만큼 더 힘들었어요. 대사를 외우고 상대 배우와 연기를 하면서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독백은 그럴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구체적인 상황을 상상하며 외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데이비가 메이시를 만지던 순간 어땠을까, 엄마의 표정은 어땠을까 상상하며 외우다 보니 에너지 소모가 많이 되더라고요.”
극중 인물의 목소리를 빌려 관객에게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독백 안에는 다른 이들의 ‘목소리’도 포함돼 있어 그 경계를 분명히 하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됐다. 이를 위해 장율은 더욱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는 “상상을 통해 그 순간에 놓이려 노력했다”며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고, 메이시 행동을 지켜보며 처음에는 강하게 이후에는 점점 더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방법을 익혔다”고 털어놨다.
“관객이 이 이야기를 잘 따라올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했어요. 모든 관객이 제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죠. 누군가는 고민이 있는 상태로 극장을 찾을 수 있잖아요. 공연을 보면서 그러한 고민이 떠오를 수도 있고요. 그렇기에 배우는 무대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목소리 톤을 더욱 분명하게 바꿔 나가며 제가 지금 누구를 연기하고 있는지 관객이 단번에 알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 안녕, 데이비
데이비는 어린 나이에 경험하지 않아도 될 일들을 겪었고, 폭력에 방치된 채 극단적인 ‘선택’을 해냈다. 그로 인해 짊어지기 힘든, 버거운 죄책감을 느끼며 몸서리친다. “외로운 아이”였던 데이비는 그렇게 장율의 아픈 손가락이 됐다. 장율은 자신의 경험담에 비춰 데이비를 바라봤다. 그는 “자존감이 굉장히 낮았을 거고, 그래서 알 수 없는 화들이 ‘툭’하고 튀어나오는 것 같다”며 미처 알지 못했던 데이비의 얼굴을 보여줬다.
“대본을 읽고 상상을 해봤어요. 데이비는 어떻게 살았을까, 어땠을까. 그리고 같이 이야기를 나눴죠. 데이비 아버지인 알란과도요.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있어요. 데이비는 자라지 못한 어른, 소년으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거예요. 화자인 데이비 나이는 24세 정도 되는데 동시에 9세, 13세 등과 같은 순간의 데이비도 보여줘야 해요. 그때의 감성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했죠. 그래서 작품을 준비하면서 영화나 다른 콘텐츠를 통해 잊고 있던 감성을 불러왔어요.”
폭력으로부터 데이비를 지켜줄 수 있는 ‘어른’은 존재하지 않았다. 장율이 데이비 목소리를 빌려 전달한 삶 속에 제대로 된 어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엄마와 아빠는 부모로서 제 소임을 다하지 못했고, 방치라는 이름의 또 다른 폭력을 행하며 상처를 더했다. 가장 부모가 필요한 순간, 부모의 부재는 엄마와 아빠를 찾지 않은 아이로 데이비를 이끌었다.
“24세 데이비는 ‘어쩌면 엄마에게 이야기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순간 데이비는 아니에요. 진짜 이야기하고 싶었으면 했겠죠. 그만큼 엄마와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어요. 엄마는 데이비를 집에 가두고 일하러 나가는 사람이잖아요. 데이비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어요. 아빠는 데이비에게 필요한 존재이지만 옆에 없는 사람이죠. 그만큼 아빠의 부재가 데이비에게 크게 다가왔을 거예요. 아빠도 데이비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시절을 보냈을 텐데, 아빠가 있었더라면 친구처럼 이야기해줬을 텐데, 그런 존재가 데이비에게는 없었던 거죠.”
지금이라도 데이비 곁에 ‘괜찮은’ 어른이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아쉬움이 자꾸만 남는다. 공연을 보는 순간에도, 공연장을 나서는 순간에도 마음 한켠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뒤엉켜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장율은 “데이비를 연기하고 있지만, 옆에 데이비 같은 친구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것 같다”고 말했다. 이는 오래 전 연극열전 관계자에게 받은 질문이었지만, 그는 지금까지도 고민하며 답을 찾으려 애쓰며 대답을 이어나갔다.
“‘킬롤로지’는 어른으로써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게 하는 작품이에요. 큰 범주 안에서 우리는 계속 폭력에 노출돼 살아가겠죠. 그 안에 있으면 쉽게 이야기할 수 없을 거예요. 저 역시 그랬어요. 과연 내 세계를 어른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죠. 그래서 말하지 못하고 넘어간 적도 있어요. 그러면 상처가 생기기 쉬운데 말이죠. 그런 것들을 털어놓을 수 있는 어른이 돼야 하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부모가 될 준비가 안 된 이들이 부모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부모가 자식에게 미치는 영향을 극단적이지만 가장 명확하게 표현한 ‘킬롤로지’는 관객에게 물음표를 던지며 사색의 시간을 마련한다. 데이비가 맞이한 비극적인 결말은 누구의 ‘잘못’인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장율은 부모가 달라지면 바뀔 데이비의 삶을 그리며 대답을 대신했다.
“부모님의 행동이 그와 같지 않았더라면, 데이비는 충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킬롤로지’가 작은 희망을 전달한다고 생각해요. 어른들, 그리고 이 사회가 어떻게 아이들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많은 것들이 달라질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 ‘킬롤로지’에서 마지막 장면을 제일 좋아하는데 데이비가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 심정이 어땠는지 이야기하는 순간이죠. 그 말을 하기 위해 데이비는 1시간 50분을 달려왔어요. 그 장면을 어른들이 꼭 봤으면 좋겠어요.”
데이비는 말한다. “밤을 향해 달렸어요. 별들에게. 난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으로”라고. ‘별’은 폴 이야기에도 등장한다. 폴은 아버지와 함께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바라본 기억을 떠올린다. 장율은 “그 글을 처음 읽었을 때 소름이 돋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그 순간 데이비가 느꼈을 감정들을 나열하며 ‘별’의 의미를 되짚어 나갔다. 무수히 많은 별들, 그 속에 혼자인 데이비라면 어땠을까.
“데이비는 달리고 있고, 별이 쏟아지는 이미지가 그려졌어요. 사라지고 싶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 같았어요. 이대로 사라지고 싶은데 몸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인 거죠. 별은 데이비에게 닿을 수 없는 아빠, 닿을 수 없는 미소가 아니었을까요. 내가 가질 수 없는 것들인 거죠. 밤하늘의 별, 언제가 저 별에 갈 수 있겠지 하면서 말이에요.”
‘킬롤로지’ 무대에 오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는 장율은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고. 스스로 아직은 어른이 되지 않았다 평했지만 그의 답변에서는 데이비를 보듬어줄 따뜻함이 묻어나 희망을 엿보게 했다.
“옆에 있어 주는 게 가장 좋은 위로라고 하죠. 제가 옆에 있겠다고 하면, 데이비가 때리지 않을까 걱정이 돼요. 그래도 데이비가 허락해준다면, 그래서 제가 데이비 옆에 있을 수 있다면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딱 그 말이면 충분할 것 같아요.”
# ‘킬롤로지’ 그리고 작은 희망
공연 내내 눈물 마를 시간 없는 장율은 데이비로 분해 관객의 눈물샘도 제대로 자극한다. 배우도 울고, 관객도 울고, 공연장은 그야말로 눈물바다가 따로 없다.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커튼콜이 시작되면 장율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은 미소로 관객과 마주한다. 살짝 배신감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어쩌면 그렇게 해맑을 수 있나 싶을 정도.
“‘킬롤로지’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극이에요. 그만큼 무겁지 않게, 관객을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공연을 보며 느낀 슬픈 감정은 커튼콜에서 웃으면서 털어냈으면 해요. 연극이라는 것이 지금 당장 깊이 있게 생각하고,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떠올려도 되고, 문득 생각이 나면 그때 곱씹어 봐도 되죠. 지금 당장은 슬프더라도 감정을 빨리 털어내길 바라요. 가끔은 그래야 보이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전달해야 하는 배우, 장율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우려와 달리 그는 인터뷰 내내 밝고 유쾌한 모습으로 데이비의 심정을 대변했다. ‘우울하지 않을까’ 걱정이 돼 준비했던 질문이 무색하게도 “배우는 이겨내야 합니다”며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반짝였다.
확실히 장율에게 ‘킬롤로지’는 큰 도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작품에 애정을 아끼지 않았고, 대답과 동시에 작품 홍보도 철저하게 해 놀라움을 안겼다. 장율은 “시간 내서 오신 발걸음이 아깝지 않은 작품이다.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연극만이 가지는 힘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라며 “작은 희망이 극장 안에 있다. 어서 와서 같이 느끼길 바란다”고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이에 그의 자신감이 관객에게 닿기를 기대해 본다.
사진 홍혜리·에디터 백초현 yamstage_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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